경주의 역사문화 발굴과 보존, 계승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경주시대’는 창간을 맞아 ‘경주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힘들었던 1950년대 경주시민들에게 지식의 장, 공부하는 장으로 기능을 했던 경주도서관(당시 경주읍립도서관)의 설립과정과 역할, 도서관을 위해 헌신한 엄대섭 선생의 발자취를 준비했다.[편집자 주]경주시민의 공동서재 공공도서관(1)경주읍립도서관 설립읍사무소 회의실과 동거 엄대섭 관장은 울산군에 사립무료도서관 시설을 기부하여 공립도서관으로 운영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인근 경주를 생각했다. 고향에서는 선의적으로 공익사업을 하고자 해도 오해와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나기 어려웠으나 외지인 경주가 오히려 마음이 편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경주는 일본에서 돈을 벌어 기와집과 땅을 사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 두었고, 부모 형제가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편 경주는 신라의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옛 도시로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놓여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이자, 경주국립박물관, 금융조합, 법원 등 신문물이 일찍부터 유입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의식이 비교적 깨어있었다.
엄 관장은 1953년 경주읍사무소를 찾아가서 울산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립도서관 시설과 장서를 기증할 테니, 이를 기반으로 공립도서관 설립을 제안하자 경주읍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지역사회의 반응이 궁금했다. 읍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하더라도 지역사회에서 탐탁지 않게 여긴다면 울산과 같은 일이 없을 것이라 장담하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경주에 살고 있는 김종준을 찾아갔다. 그는 오촌 조카뻘로 평소 뜻이 잘 맞고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다.
김종준은 울산사립무료도서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엄 관장의 고민이 무엇인지도 잘 알았다. 그래서 본인과 친분이 있는 경주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엄 관장을 소개했다. 경주박물관을 중심으로 사회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로, 김교식(초대 민선 경주시장), 진홍섭(경주박물관장), 윤경렬(민속공예가), 김태중(교사) 등과 교류하며 이들에게 도서관 운영의 뜻과 취지를 설명하자 도서관 설립을 반기며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김종준을 중심으로 지역 인사 20여 명이 ‘관우회(館友會)’라는 도서관 건립 후원회 성격의 모임을 결성하여 지지해 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경주읍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찬성은 했으나 당장 도서관을 설치할 만한 공간이나 예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 관장은 도서관 개관을 미룰 생각이 없었다. 읍에서 당장 도서관 건물을 지을 예산이나 부지가 마련될 리도 없고, 읍사무소 회의실에라도 개관하여 운영하면서 도서관 건물 문제를 거론하여 부지와 예산을 확보하고 신축하겠다는 계획이다.
1953년 3월 2일 울산사립무료도서관을 접고, 기반시설을 경주로 옮겨 5월 8일부터 경주읍립도서관 무보수 촉탁직 관장을 맡아 개관 준비를 했다. 당시 경주읍사무소는 군청과 떨어져 읍내 중심가인 동부동에 있었다. 형편대로 20여 평 되는 읍사무소 회의실 한쪽에 철망으로 공간을 구분하여 벽면에 서가를 설치하고, 울산에서 옮겨온 도서 2천여 권과 관우회가 수집한 도서 가운데 쓸 만한 책을 골라서 비치했다.
열람석은 울산에서 사용하던 목재탁자와 의자를 놓았다. 이렇게 하여 1953년 7월 1일 경주읍사무소 회의실 한 편에 ‘경주읍립도서관’이란 이름의 공립 공공도서관 문을 열었다. 이렇듯 외관은 갖추었으나 읍에서도 도서관을 지원할 형편은 안 되었고, 엄 관장은 야간고등학교 학생 한 명을 급사로 두고 자비로 운영을 시작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김윤근 선생은 그 시절의 도서관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2021년 11월 23자 메일) ‘경주가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읍사무소는 경주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 왼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강당 겸 회의실 한 켠에 닭장처럼 그물망을 치고 신발장 같은 서가를 만들어서 책을 꽂았어요. 그리고 나무로 된 탁자하고 장의자를 놓고 회의가 없을 때는 거기서 책을 읽었는데, 회의가 있을 때는 모두 밖으로 나와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다가 비라도 내리면 책을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도서관이라 해도 자체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단층 건물에 읍사무소로도 넉넉지 않은 공간에 회의실과 도서관이 동거한다는 것은 환경이 열악하기도 하지만 서로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1980년대와 1990년대 동사무소 회의실에 설치한 마을문고와 비슷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당시 경주시립도서관 직원으로 근무했던 정재영 선생은 ‘그때 읍사무소 회의실에 있던 경주도서관은 좁고 낡은 책더미 속에서 근무했는데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나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제법 많이 있었지요’라고 회고했다.
당시 전국의 공공도서관은 수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도서관이 아니었다. 『한국 공공도서관 운동사』이연옥, 한국도서관협회, 2002,에 따르면 1950년도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은 남한에 19개 정도 있었는데 한두 곳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설립 운영하던 것을 해방이 되자 인수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운영할 형편이 안 되어 거의 휴관 또는 폐관 상태에 있었다. 거기에 한국전쟁까지 겪으면서 도서관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경상남북도에는 부산, 대구, 마산에 일제에 의해 건립된 부립도서관이 있었으나 당시 도서관은 1933년 일제에 의해 제정된 규정1933년 제정된 경성부립도서관 사용조례 등에 따라 관행대로 입관료를 받고 일반열람실 좌석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 관행은 1963년에 제정된 「도서관법」에도 반영되어 1991년 법이 개정될 때까지 공공도서관에서 입관료를 받고 일반열람실 좌석을 배정하는 학생들 공부방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경주읍립도서관은 개관 당시부터 공부방을 배제하고 입관료 없이 자료 이용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경주도서관은 읍에서 여러분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주민들의 공동서재이며, 주민 누구나 자유롭게 도서를 이용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협조하는 곳입니다.’라는 내용을 인쇄하여 홍보하고 많이 이용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도서 대출뿐 아니라 각종 전시회도 개최했다는 내용을 『경주시사(慶州市史); Ⅱ』경주시사편찬위원회 편, 200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2장 예술편, 제3절 미술’에서 ‘서양화가 최기석崔璣錫(1918∼1989)의 첫 개인전은 1954년에 서라벌미술가협회 주최로 당시 경주읍립도서관에서 열렸는데 「계림」, 「안압지」, 「문천」, 「경주읍성」, 「감은사탑」 등 유화 34점이 출품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경주읍사무소와 함께 사용하던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도서관은 도서뿐 아니라 각종 문화프로그램도 준비하여 시민들의 교양 함양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울산사립도서관에서 운영했던 순회문고와 독서회도 운영했다.
초기에는 관장 외에 대출 반납을 담당하는 야간 고등학생 급사 한 명을 두고 운영했으나 1955년 경주시로 승격을 준비하면서 공무원이 늘어나 도서관에도 직원이 배정되었다. 엄 관장은 김종준을 설득했다. 김종준은 공무원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할 정도로 집안에 재력이 있고 금속공예가로서 능력도 있었으나, 엄 관장은 자신의 뜻을 잘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김종준을 채용했다. 그 후 1958년 4월 직원을 증원하여 정재영과 고용수 씨가 근무하게 되었다.
엄 관장은 개관 초기부터 독립건물로 도서관을 신축하기 위해 계속 신경 쓰고 다녔다. 여기저기 마땅한 장소를 찾아보기도 하고, 도움이 될 만한 인사도 만나고, 도서관 건축에 관한 공부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우리나라 경제가 몹시 어려웠던 이유도 있지만, 도청으로부터 예산을 배정 받아쓰는 지방 관청에서 법적 근거도 행정사례도 없는 도서관 건립 예산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1955년 경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경주시청 신청사를 신축할 때 시립도서관 건립도 같이한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경주시에서도 시 승격과 더불어 도서관 건축을 계획했다는 기록이 『경주시사(慶州市史)Ⅱ』 ‘제6편 문화·예술, 14. 경주시립도서관’에 나와 있다. 본 시립도서관은 1953년 7월 1일 한국전쟁 중에 개관되었다. 그 설립은 당시 읍의회 의원 및 유지 그리고 읍 당국의 절대적 노력과 성원 하에 사설 도서관을 운영하던 엄대섭(嚴大燮)의 기증도서(寄贈圖書) 1,000여권을 기본도서로 하여 우선 동부동(東部洞) 읍사무소 회의실을 관옥으로 쓰기로 하고 경주읍립 도서관을 발족하였다. 당시는 아직 도서관법(圖書館法)이 발포(發布)되기 전이어서 경주도서관 설립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 후 시 승격과 함께 시립도서관으로 변경되었다. 시립도서관의 건물 문제는 정부 보조금으로 이루어진 시청사 신축계획의 일부로서 일백 수십 평의 독립건물이 설립될 계획이며 도서관 설립의 후원단체로서는 관우회〔館友會, 회장 김종준(金鍾埈)〕가 조직되어 도서수집과 독서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 경주시 기록에는 관우회가 나중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관우회는 1953년 경주읍립도서관 개관 전에 이미 조직되어 개관 준비를 지원했고, 김종준은 1955년 1월부터 읍립도서관 직원(사서보)으로 임명되어 엄 관장을 돕고 있었다.
시립도서관 건립을 위한 예산확보는 시청당국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루지 못하여 무산되었으나 경주시는 새로운 청사로 입주했고, 도서관이 있는 옛 읍사무소는 경주시의회가 사용하게 되었다. 도서관은 경주시립도서관으로 승격되었으나 건물이 신축되기 전까지 계속 그 자리에서 시의회와 동거할 수밖에 없었다. 읍사무소 시절에도 그랬듯이 경주시의회와 함께 할 당시에도 의회가 열리거나 회의실을 사용할 일이 있을 때는 이용자를 모두 밖으로 내보내야 했고, 그들은 건물 밖 뜰에서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비가 내리는 날은 바깥에서 책 읽는 것도 안 되니 대출해서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엄 관장은 시의회 회의실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도서관을 독립건물로 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시청을 찾아가 도서관은 독립적 건물이 시급하다는 것을 관계 공무원에게 설명하고 설득했지만 시 예산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경주시립도서관 신축을 위해 도청에 출근하듯이 드나들며 엄대섭 관장을 비롯하여 관우회 등 적극적인 도서관 이용자층은 경주시립도서관 신축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었다. 경주가 시로 승격이 되면 읍사무소 회의실 더부살이에서 벗어나 버젓한 도서관 건물을 세워서 마음껏 운영하고 이용하도록 하자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경주가 시로 승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건립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그때부터 엄 관장의 도서관 건립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열정과 승부 근성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도서관 건축을 위해 하루도 편히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고 직접 발로 뛰어다녔다. 대구에 있는 경상북도청을 찾아가 당국자를 만나 설득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역 인사들도 만나 설명했다. 그래도 예산확보가 안 되자 어느 날 지게에 책을 한 짐 지고 도청사로 가서 도지사실 입구 복도에 받쳐 놓았다. 직원들이 뛰어나와 ‘왜 이러시느냐, 제발 이러지 말라’며 만류를 했지만 엄 관장은 ‘도서관이 갈 곳이 없으니 여기라도 책을 가져다 놓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도서관 건립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어쩔 수 없다’며 물러설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은 담당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받쳐 놓았다. 이렇게 며칠 동안 도지사실 앞 복도와 담당 부서 사무실을 번갈아 가며 책을 가득 담은 지게를 받쳐 놓고 1인시위를 했다. 당시 경주시립도서관 직원이었던 정재영 선생은 ‘엄 관장님이 책을 한 지게 지고 도청에 가서 받쳐 두었다는 이야기를 당시에 들었어요. 그렇지만 도서관 직원들은 엄 관장님의 도서관 건립에 대한 열정을 알았기 때문에 별난 행동에도 그저 웃으며 넘길 수밖에 없었어요. 엄 관장님은 얼마든지 그러시고도 남을 분입니다. 도서관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도 못 따라갑니다.’라며 엄 관장의 도서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회고했다.
당시의 이 일에 대해 정재영 선생과 김윤근 선생은 도지사실에 책을 가져다 놓았다고 기억하고 있으나 내가 <대한도서관연구회> 시절 엄 회장께 직접 들은 바로는 도지사실 앞 복도와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하루씩 번갈아 가며 며칠을 세워두었다고 했다.
엄 관장이 도서관 건립에 협조받기 위해 만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사들인지 궁금하여 정재영 선생에게 문의하니, 이런저런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신경 쓰느라 김종준 선생과 이야기하고 조용히 다녔기 때문에 직원들은 그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알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직접 만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나 당사자는 말을 하지 않고, 엄 관장이나 김종준 선생도 안 계시니 그저 궁금증만 남았다. 결국 엄 관장의 끈질긴 노력과 설득이 통했다. 1958년 경상북도를 통해 경주시립도서관 건축 예산을 국비로 확보했다. 물론 경주시의 도시계획으로 도서관과 함께 동거하고 있던 경주시의회 회의실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면서 시의회를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사정도 있었다. 그러나 법적 근거도 행정사례도 없는 도서관 건축비를 받아 낸 것은 엄 관장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주시립도서관 건립 계획은 1958년 11월부터 1959년 8월까지 신축하는 것으로 하고, 부지는 일제강점기에 경주역사가 있던 사정동 1-26번지(현주소 경주시 금성로 236) 공터로 확정되었다. 사정동은 현재 경주중앙도서관과 서라벌문화회관이 있는 자리로, 일제강점기에 경주역사(1918.10~1936.11)가 있다가 1936년 성동동으로 이전하였다. 성동동 역사도 지난해(2021년) 12월 28일 폐쇄되었다. 사정동 1-26번지는 경주역이 이전하고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예정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계획 없이 방치되고 있던 자갈밭이었다.
1958년 11월 20일 도서관 건물 착공식이 있었다. 적은 예산으로 만족할만한 도서관을 건축하지는 못하겠지만 독립건물을 가지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경주시립도서관 설립예산은 국비 보조금으로 공사비 920만 원과 건물 수리유지비 40만 원 등 총 960만 원으로 부지 2,800여 평에 건평 103평(약 340㎡)의 단층 건물로 설계되었다. 건물설계는 당시에도 잘 알려진 건축가 김중업이 맡았다.
경우 103평짜리 지방의 경주시립도서관 설계를 당시 파리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에서 건축사무소를 낸 김중업 건축가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은 1955년 경주읍이 시로 승격할 때 시청설계를 그가 맡았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도서관 건축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엄 관장은 시청사를 설계한 그를 눈여겨봤다.
몇 년이 지나 도서관 건립이 확정되자 김중업 설계사무소를 찾아가서 도서관 설계를 부탁했고, 비록 작은 공사지만 그는 기꺼이 맡아주었다는 것이 정재영 선생의 기억이다. 김중업은 서강대학교 본관, 제주대학교 등 여러 대학교 건물과 프랑스 대사관, 지금은 서울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삼일빌딩,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등 이름난 건물을 많이 설계했다. 당시 엄 관장이 서울에서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직을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중업 건축사 섭외가 좀 더 수월한 면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 시공은 대구에 소재한 ‘주식회사 대륭건설’이 했다.
정재영 선생은 ‘도서관이 읍사무소 회의실에 있다가 그곳을 경주시의회가 사용하면서 시의회 회의실이 되었지요. 의회가 열릴 때는 도서관을 휴관했습니다. 이용자 모두 밖으로 내보내면 집에 가지 않고 처마 아래 쪼그리고 앉아 책을 보고 했어요. 그러다가 구 경주역 자리 자갈밭에 도서관을 지었어요. 자갈밭에 건물을 지었으니 조경을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김종준 씨가 나서서 우리 직원들이 자갈을 다 긁어내고 거기다 흙을 부어서 화단을 만들어요. 그리고 엄 관장님 남동생이 두 분 있었는데 그분들이 와서 일도 많이 도와주었고, 독서회원들도 수고를 많이 했지요’라고 회고했다. 요즘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경부선 기차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9시간이 소요되던 그 당시에 엄 관장은 서울에서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 업무를 겸하여 경주로, 대구로, 다시 서울로 그 먼 거리를 부지런히 오가며 경주시립도서관 신축이라는 큰 일을 해냈다.
1980년대 내가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 일할 때 회보 《오늘의 圖書館》을 정부 부처와 서울시 관공서 사무관 이상 공무원들 책상 위에 직접 가져다 놓는 일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잡상인 취급을 받기도 하는 등 그 일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엄 회장은 독려인지 위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경주시립도서관 건축 문제로 경상북도 도청에 책을 지게에 져다 놓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는 내 설움이 컸기 때문에 독려도 위로도 되지 않았고,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외에도 틈틈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새겨듣지 않아서 잊어버린 내용도 있고, 그 때 호기심이 좀 있었더라면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무심해서 놓친 부분도 많아 아쉽고 죄송한 마음이다. 글=정선애 작가정선애 작가는?
대학시절 마을문고 운동 동아리활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서관학과 4학년 때 엄대섭 회장을 직접 찾아뵙고,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 도서관운동 조수로 일했다. 그 후 <대한도서관연구회> 에서 훈련받고 일한 자부심을 가지고 서울시 새마을이동도서관 사서, 한국도서관협회, 학교도서관 등을 거쳐 2006년부 터 관악구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고 2022년 퇴직했다. 2021년 엄대섭 선생의 공공도서관 개혁운동 이야기 「지금 쓰지 않으면 잊혀질 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