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운동가 엄대섭의 발자취를 찾아서(2)경주의 역사문화 발굴과 보존, 계승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경주시대’는 창간을 맞아 ‘경주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힘들었던 1950년대 경주시민들에게 지식의 장, 공부하는 장으로 기능을 했던 경주도서관(당시 경주읍립도서관)의 설립과정과 역할, 도서관을 위해 헌신한 엄대섭 선생의 발자취를 준비했다.[편집자 주]고향 울산에서 시작한 도서관운동3. 수상한(?) 도서관장 방해 요소는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대부분 사람이 도서관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스스로 알아서 잘 이용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그러지 못했다.   12세 이상 국민의 문맹률이 78%로 높았고, 도서관도 거의 없었다. 일반시민뿐 아니라 관공서 공무원들도 도서관의 필요성이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여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시설을 해 놓고 대가 없이 무료로 책을 빌려준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고향에서 무료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으니 주변에서 각자 자기 생각에 따라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길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의 치과병원 원장을 만났다. “엄 선생 안녕하시오, 요즘 별일 없습니까?” “네 그럼요, 원장님도 안녕하시지요?” “나야 늘 그렇지요. 시간 있으면 나와 이야기나 잠깐 합시다.”   엄 관장은 영문도 모른 채 그와 마주했다. 그리고 병원장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 선생 내가 궁금해서 그래요. 소문을 듣자 하니 다가오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데 그게 정말이요?” 엄 관장은 아연실색했다. 근거 없는 소문에 아니라고는 했지만 어디까지 믿을지도 모르겠고,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자비로 무료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엄대섭이 정치를 하기 위해 무료도서관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당시 사회가 어수선한 틈에 지역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잘난 체하는 사람 중 일부는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편 남북이 이념으로 대치하던 때라 사상적인 문제에도 매우 민감했다. 당시 독서회를 가장하여 사상교육을 하는 지하조직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자비로 무료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으니 혹시 공산주의자 또는 간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찰은 수시로 드나들며 큰 재벌도 아닌 개인이 도서관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무료로 책을 빌려주고 읽게 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의심하고 감시했다. 경찰서 주임에게 우리가 가난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무지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걸 왜 당신이 한다는 거요? 어디 두고 보겠소.’ 하고 으름장이다. 그리고 툭하면 사찰 주임이 엄 관장을 불러 조사했다.   한편 엄 관장은 독서 습관이 안 되어 있고,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약한 지역주민들에게 자극을 주어 책을 읽어야겠다는 동기를 만들어주자는 생각으로 도서관 벽면에 과격한 문구의 표어를 만들어 붙였다.    ‘먹고만 사는 것은 사람 닮은 짐승이다. 사람 짓 하려거든 책 괄시마소’라는 표어를 붙이고, ‘조용히 하시오’하는 문구와 입에 자물쇠를 채운 그림을 덧붙였다. 이러한 과격한 표현들이 경찰 눈에 더욱 거슬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들을 빗댄 것 같은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경찰이 찾아와 장서를 검열하고 사찰 주임이 수시로 오라 가라 하는 호출에 시달리는 것도 괴로웠지만, 이용자들의 독서 성향이나 이력까지 조사하기 시작하자 찾아오던 주민들도 거리를 두고 점차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엄 관장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용자가 찾지 않는 도서관은 더 이상 도서관으로서 의미가 없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시대가 어수선할 때는 관에서 해야 할 일을 개인이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군郡에 기증하여 공립도서관으로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울산군청을 찾아갔다. 군수를 만나 도서관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현재 운영 중인 사립도서관 시설 일체를 기증할 테니 공립도서관으로 운영할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군수는 ‘우리는 그런 시설을 들은 적도 본적도 없다.’라며 거절했다.    당시 울산군수 입장에서는 도서관에 대한 개념이 없기도 했겠지만, 한편 생각하면 경찰서 보안과의 사찰을 받고 걸핏하면 관장이 경찰서로 불려 다니는 상황에서 자칫 잘못 엮였다가 곤란한 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결국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1951년 6월 6일에 개관한 울산사립무료도서관은 2년 9개월 만인 1953년 3월 2일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울산사립무료도서관 시절 시작된 엄 선생에 대한 경찰 보안과의 사찰은 30년이 지난 198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대한도서관연구회> 시절 나는 역삼동 국립중앙도서관 분관에 있던 공공도서관 관계자료실에서 ‘전국공공도서관 운영평가표’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검은 양복 차림을 한 사람이 찾아와서 명함을 주며 안기부 직원이라고 본인 소개를 했다. 안기부에서 무슨 일로 왔는지 물으니 의례적인 방문이라 하면서 <대한도서관연구회>가 무엇을 하는 단체냐, 임원은 어떤 사람들이며 재정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전국공공도서관 운영평가표는 무엇을 평가하는 것이냐? 등등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 정관, 임원명단, 회의록, 회보 등 자료를 요구했다. 당시 나는 엄 선생이 안기부 사찰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순진하게도 도서관에 관심으로 생각하여 열심히 자료를 챙겨준 적이 있다.    그 무렵 어느 시점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안기부 직원이 이용남 교수를 찾아가서 엄대섭 선생이 그간 사찰대상이었으며, 이제 그 대상에서 해제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용남, 『이런 사람이 있었네』, 한국도서관협회 2013. 147~149쪽 그러나 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엄 선생은 30년이 넘는 세월을 사상적으로 어떤 의심 받을 일을 한 적이 없고,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욕심 없이 오로지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서관을 통하여 무지를 깨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자 한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나는 개인적으로 종교가 없지만 성경 「마태복음 13장 54절부터 58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자기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때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와 그 놀라운 능력을 얻었을까,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는 분이 아닌가,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다. 예수도 고향에서는 사람들의 선입견과 편견, 불신으로 능력을 행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듯이, 엄 선생도 생계가 곤란하여 고향을 등지는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가 금의환향하여 순수한 뜻으로 도서관 사업을 시작했지만, 주변에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여 결국 도서관 사업을 접고 타지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4. 그 후 울산에서 울산사립무료도서관은 외곽지 주민들 이용 편의를 위해 시외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했다고 한다.  해방 후 1945년부터 1971년까지 울산 시외버스정류장은 울산시 중구 성남동 173-5번지 일대향토문화전자대전: 버스 터미널, 울산역사문화대전, 지리·인문지리, 울산광역시에 있었다. 현재 주소로는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로 73번지가 된다.    최진욱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울산시립미술관이 된 중부도서관(북정동1-3, 현주소 도서관길 72) 근처에 있었다.최진욱, 『엄대섭이 꿈꾼 지식나눔터 :공공도서관』, 현북스, 2021 중부도서관 자리는 과거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던 곳과는 약 700미터 떨어져 있어, 현재 위치로 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에서 북정동 사이 어느 지점에 소재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울산중부도서관 부지가 어떻게 선정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울산사립무료도서관이 있던 자리 근처에 세워졌다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다. 이외에 또 다른 인연도 있다.   울산중부도서관은 1984년 8월 개관 당시에는 울산시립도서관이라고 했다. 도서관을 건립하고 개관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대한도서관연구회> 엄대섭 회장은 전국공공도서관을 순방하고 있었다. 그때 폐가제 도서관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시청당국자와 관장(박영수)을 몇 차례 만나 개관과 동시에 개가제로 운영할 것을 설득했다.    시청당국자나 관장은 개가제와 도서 대출제의 필요성은 이해했으나 건물구조가 폐가제에 맞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중도에 변경하려면 복잡한 절차가 따르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것이다. 국비나 시도 보조금은 때에 따라 시도지사의 승인까지 받아야 하는 등 매우 까다로운 절차가 있어서 공무원들은 가급적이면 중간에 설계 변경을 하지 않는다. 울산시립도서관도 설계대로 폐가제로 개관했다가 개가제로 전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다음 해인 1985년 12월 전면 개가제로 바꾸고 도서 대출제도 실시했다.    그 해 8월에는 <대한도서관연구회> 주력사업의 하나인 이동도서관 운영을 시작하여 도서관과 먼 거리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 서비스를 실시하는 등 중소 공업도시 도서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울산시립도서관은 1988년 울산시립중부도서관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92년부터 울산중부도서관이 되었고, 위치도 지금의 자리(울산시 중구 시계탑거리 38)로 이전했다. 그 사이 울산시는 공업도시로 크게 발전하여 광역시가 되었다.   울산문화원도서관은 1969년 10월 10일 울산문화원(원장 박영출)이 울산시 남구 달동 518번지에 자체 건물을 신축하면서 도서관도 같이 개관하게 되었다. 연면적 약 1,340㎡에 열람석 320석 규모의 문화공보부 소속 공립 공공도서관이었다. 개관 준비를 하면서 도서 수집을 위해 지역 출신 유지들에게 청탁했는데 마을문고 운동을 하던 엄대섭 선생이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울산문화원 박영출 원장은 <대한도서관연구회>의 평생회원으로 참여하는 등 엄 선생의 도서관 개혁운동을 응원했다. 울산에 도서관이 없던 당시 ‘처용독서회’가 공공도서관 설립 운동을 전개하여 문화원에서 개관하게 되었으나 2001년 문화원이 폐원되면서 도서관도 폐관되었다. 울산은 엄대섭 선생 고향(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1438번지)이란 점도 있으나 도서관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던 ‘도서관 운동가 엄대섭’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2012년 11월 9일 울주군문화재단에서 주최하여 울주군문예회관에서 개최한 ‘엄대섭, 도서관에 받친 혼’ 토크콘서트와 기획전시는 엄 선생의 도서관 운동과 정신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2017년 울주의 인물로 엄대섭 선생이 선정되어 울주군선바위도서관 어린이자료실 앞마당에 흉상을 세워 울주군민들에게 지역 인물과 도서관 정신을 알리고, 다양한 독서문화 행사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울산광역시 대표도서관인 울산도서관이 개관을 기념해 ‘엄대섭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도서관 운동가의 고향이자 도서관운동이 시작된 곳으로서 엄대섭 선생의 도서관 정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발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새마을문고 울산광역시 울주군지부(회장 문군자)에서는 독서의 달에 흉상이 있는 울주군선바위도서관에서 엄대섭 선생 추모행사를 가지고 그 뜻을 새기며, 주기적으로 흉상을 닦는 등 관리하고 있다.   글=정선애 작가정선애 작가는? 대학시절 마을문고 운동 동아리활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서관학과 4학년 때 엄대섭 회장을 직접 찾아뵙고,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 도서관운동 조수로 일했다. 그 후 <대한도서관연구회> 에서 훈련받고 일한 자부심을 가지고 서울시 새마을이동도서관 사서, 한국도서관협회, 학교도서관 등을 거쳐 2006년부 터 관악구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고 2022년 퇴직했다. 2021년 엄대섭 선생의 공공도서관 개혁운동 이야기 「지금 쓰지 않으면 잊혀질 이야기」를 썼다.
최종편집: 2025-04-30 23: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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