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운동가 엄대섭의 발자취를 찾아서(1)
고향 울산에서 시작한 도서관운동경주의 역사문화 발굴과 보존, 계승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경주시대’는 창간을 맞아 ‘경주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힘들었던 1950년대 경주시민들에게 지식의 장, 공부하는 장으로 기능을 했던 경주도서관(당시 경주읍립도서관)의 설립과정과 역할, 도서관을 위해 헌신한 엄대섭 선생의 발자취를 준비했다.[편집자 주]1. 울산사립무료도서관을 열고 엄대섭은 일본에서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을 서둘러 3일 만인 1945년 8월 1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조국에서 안정적으로 할 사업을 찾고자 했으나 혼란한 사회에서는 무슨 일을 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1950년대 우리 사회는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으나 대다수 사람이 배우지 못하여 무지하고 가난하여 겨우 입에 풀칠하며 연명할 정도로 살아가는 형편에, 남북이 이념으로 대립하고 있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엄대섭은 시대의 흐름을 관망하며 부산에서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고, 처는 부산진시장에서 팥죽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습관대로 헌책방을 돌며 이 책 저 책 뒤지다가 시청 앞 어느 노상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圖書館 運營の實際的 經營도서관 운영의 실제적 경영』 乙部泉三郞(오또베 센자브로), 東洋圖書株式合資會社, 1939이란 책이 그 마음을 자극했다.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책과 도서관에 대한 열망이 수면 위로 올라와 그 의지를 부추겼다.
‘공공도서관은 국가에서 건립하여 세금으로 운영하고 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공공기관이다. 우리 정부도 도서관을 설립하여 무지하고 가난하게 사는 국민을 구제해야 하겠지만 현 정부는 그럴만한 능력이 안 되니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선 내가 도서관을 세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무료로 책을 읽고 무지와 가난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어느새 도서관 운영을 구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평생 업으로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혼란한 시기에 새로운 사업을 찾을 때까지 임시로 해 볼 생각이었지만, 평소 생각이 깊은 그는 아무리 임시로 하는 일이라지만 시작할 것이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믿었다. 부산 같이 큰 도시는 비교적 교육이나 문명의 혜택을 받기 쉬우니 도시보다 배움이나 문화로부터 소외된 시골 농어촌 지역주민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향 울산을 찾아갔다.
고향 울산은 이십몇 년 전, 여덟 살 어린 나이로 가난에 밀려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떠나갈 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 이런 지역일수록 도서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엄대섭은 외곽의 변두리 사람들도 찾아오기 쉽도록 군 소재지 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가게를 구하고 도서관 운영을 준비했다. 겨우 10여 평 정도 되는 가게에 서가를 짜 넣고, 시골 장터 국밥집 자리와 같은 나무로 된 탁자와 등받이 없이 두세 명이 함께 걸터앉는 긴 의자 몇 개를 놓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책과 그간 국내에서 사 모은 것 등 3천여 권을 비치했다. 반 정도는 일본어 서적이었지만 그래도 이광수의 ‘흙’, ‘사랑’ 등 현대소설이나 ‘춘향전’, ‘심청전’ 같은 고전과 읽을 만한 역사 교양서도 제법 있었다.
마침내 1951년 6월 6일 ‘울산사립무료도서관’이란 간판을 걸고 도서관 문을 열었다. 당시 국내에 공공도서관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같은 큰 도시에 일본인들로부터 접수한 몇 곳이 있었으나 일부 식자층과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도서관이 어떤 곳인지 몰랐고 책도 귀했다. 배우지 못하고 책 한 권 사서 보기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일수록 배움과 지식이 더욱 절실하여 무료로 빌려주면 많은 사람이 이용할 것이란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도서관 문을 열고 보니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당시 엘리트라 할 수 있는 학생과 공무원이 대부분이고 막상 독서가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도서관을 찾지 않았다. ‘그들이 도서관을 찾지 않는다면 도서관이 그들을 찾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울산도서관 순회문고’를 시작했다. 2. 폐 탄환상자로 순회문고를 1968년 8월 7일 《마산신문》 4면에 전국 마을문고 5천 개 설치 돌파 특집으로 ‘일요특집 마을문고의 발자취’라는 기사가 실렸다. 첫머리에 울산 사립무료도서관 순회문고가 마을문고를 창안한 동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마을문고가 창안되기까지 엄대섭씨는 1951년 6월 6일 경남 울산군에 사립무료도서관을 설치하였다. 개인 장서 3천여 권을 토대로 설치된 이 도서관은 8.15 이후 최초의 농어촌을 대상으로 한 사립도서관이다. 엄 씨는 도서관 봉사 기능을 도서관 근처 주민에만 국한하지 않고 울산군 내 전 농어민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 각 면 단위에 순회문고를 보급하기로 했다. 이때 순회문고함으로는 폐품 탄환상자를 수집하여 활용하였다. 오늘의 마을문고를 창안하게 된 동기인 이 탄환상자에 도서관 책 20여 권을 넣어 농어촌주민들에게 돌려가며 읽혔던 것이다......(이하 생략) 막상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은 교육이나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이 울산 중심부의 학생과 지식층이었다. 그들이 도서관을 찾아오지 못한다면 도서관이 그들을 찾아가서 책을 돌려 읽도록 하겠다는 것이 엄 선생의 생각이다.
당시 흔하게 구할 수 있었던 탄환상자 50여 개를 마련해 페인트로 ‘울산도서관 순회문고’ 라고 쓰고 책 20권 정도를 담아서 자전거에 싣고 울산 변두리 지역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면 소재지에 순회문고를 맡겨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주민들이 돌려가며 읽은 후 다른 마을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책 상자를 순환시켰다.
시골로 들어갈수록 문맹률이 높았다. 당시 정부에서 야학이나 기타 교육을 통하여 문맹퇴치운동을 했기 때문에 문자를 읽을 정도는 되지만 문해력이 없는 젊은이가 많았다. 이들이 책을 읽으면 문해력도 좋아질 것이란 생각도 있었다. 처음에는 교과서 외에 책이라고는 구경하기 어려운 주민들이었기에 책을 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읽으니 재미도 있어 환영받았으나 몇 차례 돌고 나니 읽을 만한 책이 바닥나고, 읽기 습관이 안 된 사람들이라 그렇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 읽기에 시큰둥해졌다.
농사철에는 농사일이 바빠서 책을 관리하고 읽을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종이책이 휴지로 쓰이거나 담배를 말아 피우는 용도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결국 울산사립무료도서관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고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는 요즘같이 지식문화로부터 소외된 계층에 대한 배려 같은 말이 없었다. 엄 관장은 개인적 독서 경험에서 얻은 사상과 신념으로 교육과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주민들을 우선 배려하여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 가난을 탈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했다. 글=정선애 작가정선애 작가는?
대학시절 마을문고 운동 동아리활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서관학과 4학년 때 엄대섭 회장을 직접 찾아뵙고,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 도서관운동 조수로 일했다. 그 후 <대한도서관연구회> 에서 훈련받고 일한 자부심을 가지고 서울시 새마을이동도서관 사서, 한국도서관협회, 학교도서관 등을 거쳐 2006년부 터 관악구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고 2022년 퇴직했다. 2021년 엄대섭 선생의 공공도서관 개혁운동 이야기 「지금 쓰지 않으면 잊혀질 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