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경주이야기(8)] 국제도시 ‘경주’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 귀퉁이에서 출발했지만,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육로와 해로로 이웃인 당나라와 일본뿐 아니라 서아시아 이슬람왕국과 더 멀리 로마와 교역을 할 정도로 세계를 향해문을 연 나라였다.
당시 서역 문화권에서 들어온 물건들은 매우 독특하고 새로웠다. 도자기나 금속과는 달리 투명함과 색깔로 눈길을 잡는 유리 제품, 특이한 냄새가 나는 향료, 이런 물건들은 신라 귀족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왕실의 무덤에서 껴묻거리로 발견되는 이들 물건이 적지 않다.
38대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 앞의 무인상이나 49대 원성왕 시기의 처용무에 등장하는 처용의 외모는, 서역인의 모습과 퍽 닮아 있다. 당시 서역인이 경주에 오면 나가기 싫어했다는 이야기가 생생해질 만큼 이국적이다.외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면서 많은 신라인이 당나라로 유학하거나 건너가 살았다.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이나 동북아시아 바다를 주름잡았던 장보고의 활약이 이와 같은 맥락이다. 혜초는 인도에 다녀온 경험을 <왕오천축국전>이란 기행문으로 남기 기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