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역사문화 발굴과 보존, 계승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경주시대’는 창간을 맞아 ‘경주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힘들었던 1950년대 경주시민들에게 지식의 장, 공부하는 장으로 기능을 했던 경주도서관(당시 경주읍립도서관)의 설립과정과 역할, 도서관을 위해 헌신한 엄대섭 선생의 발자취를 준비했다.[편집자 주]마을문고의 모태가 된 경주도서관 순회문고 경주시립도서관 사무실 겸 참고자료실 벽면 한쪽에 ‘농촌문고 도서교환’이란 별도 서가가 있었다. 도서관에 찾아오기 어려운 변두리 농어촌지역 주민들을 위해 각 마을로 도서를 보급하는 순회문고 전용 서가로 엄 관장은 울산에서 운영하던 순회문고를 경주도서관에서도 계속했다.
정재영 선생은 언제부터 운영했는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1958년 4월 경주시립도서관에 근무를 시작할 당시 이미 순회문고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김종준 선생을 직원으로 채용한 1955년쯤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전에 야간 고등학생 급사 한 명이 있었으나 순회문고까지 운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주도서관에는 폐 탄환상자 순회문고가 대여섯 개 정도 있었으며, 도서를 스무 권 정도 담아서 농어촌으로 돌아다니며 서로 교환해 주었다고 한다.
정재영 선생은 “도서관 안에서도 누군가가 대출 반납 일을 해야 하니까 제가 내부에 근무하면서 탄환상자에 책을 담아 놓으면 엄 관장님과 고용수 씨가 자전거로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교환해 주었어요. 요즘 자동차는 보링을 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차가 고장나면 밑으로 들어가서 직접 수리를 했어요. 한번은 관장님이 어디서 낡은 자동차 한 대를 구해 와서 순회문고 돌릴 때 사용했는데 수시로 고장이 나서 멈추고, 그럴 때마다 차 밑으로 들어가서 수리를 해야 했어요. 얼마 지나서 차가 안 보이길래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고장이 너무 자주 나서 수리공장에 다시 가져다주었다고 하더군요.”라며 당시 일을 기억했다. 1960년도 말 어느 날, 엄 관장은 그간 서울에서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 업무로 바빠 돌아보지 못했던 변두리 마을로 순회문고를 나갔다. 그때 어느 집안을 들여다보고 갑자기 머릿속이 핑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다.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한 것이지?’ 책을 찢어서 온 방을 도배해 놓은 것이 아닌가. 그간 책을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우거나 과일 봉지로 쓰이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도배지로 사용된 것은 충격이었다. 그때 농어촌지역을 돌아보면서 경주지역 순회문고는 물론, 도서관협회에서 대대적으로 벌린 농촌마을 도서보내기 운동의 성과가 나지 않는 원인을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농어촌 주민들은 대체로 학력이 낮고 문맹률도 높았다. 국가에서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여 야학, 군대 등에서 한글 교육을 해왔기 때문에 글자 읽을 정도는 된다 하더라도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독해력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순회문고나 ‘농촌에 도서보내기 운동’은 책 읽을 사람의 입장이나 수준은 고려하지 않고 주는 사람 입장에서 일방적 도서 보내기였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교양서나 전문 서적은 그들에게 맞지 않아서 독서에 재미를 붙일 수 없고, 강제로 수집한 것이다보니 헌 교과서나 참고서, 떨어져 나가고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책, 일본어로 된 책 등이 대부분으로 그들이 읽을 만한 가치 있는 도서가 거의 없었다.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순회문고도 처음 어느 정도까지는 읽을 만한 책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읽을 책은 줄어들었지만 어려운 예산사정으로 새로운 도서 공급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요인들로 독서습관이 없는 사람들이 책과 가까워지기 어렵고, 농한기에는 책을 읽거나 도서 관리가 되겠지만 바쁜 농사철에는 관리가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종이가 귀하던 때라 공짜로 공급하는 책은 벽지, 휴지, 과일 봉투, 담배 말이 등 종이의 대체품으로 전략했다. 수집 도서의 열악성이나 공급도서의 한계, 읽을 사람의 수준이나 형편이 고려되지 않은 일방적 퍼주기식은 그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시행착오로 경험하고,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책 걸인으로 만든다는 자책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농어촌사람들이 읽고 싶은 책을 스스로 구해서 읽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입한 책은 아끼고, 취향과 수준에 맞는 책을 읽으며 재미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마을에 설립하는 작은 시설이라 하더라도 도서관의 기본요소는 갖추어야 한다. 우선 책이 있어야 하고, 책을 꽂아 관리할 서가, 그리고 서가와 도서 대출, 반납을 관리할 독서회는 마을 청년들로 조직하여 이 세 가지를 기본요소로 마을에 소 도서관을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당장 책장과 도서구입이 어려울 것이니 씨앗 삼아 얼마간의 책과 책장 정도를 지원하면 마을 청년들이 관리하는 꼬마도서관이 하나 설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마을문고는 초기 경주시립도서관 시절에는 책장과 기본도서 지원을 엄 관장이 자비로 부담했으나, 전국적으로 보급 운동을 시작하면서 외지로 나가서 성공한 지역 인사들을 설득하여 고향이나 연고가 있는 마을에 문고 설립하기 운동을 전개했다. 1964년 3월 기관지 《마을문고》 창간호에 ‘농어촌 부흥과 독서운동’이란 제목의 창간사를 통해 엄 회장은 마을문고 운동의 취지와 지역에서 문고를 스스로 키우고 운영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농어촌의 부흥은 우리민족의 역사적인 과제입니다. 그러나 국민 스스로가 깨우쳐서 자주적인 삶을 찾기 전에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이 다 같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면에서 가난을 없애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면에서 무식을 없애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한 포기의 곡식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한 줌 거름을 주는데도 농업 지식을 가져야 하며 동리의 모임이나 여러 가지 선거에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회지식이 있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 시대의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먼저 문화적인 면에서 무식을 없애는 것이 물질적인 면에서 가난을 없애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문맹퇴치 교육을 위한 정부와 민간의 노력으로 많은 농산어촌 주민들이 독서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책도 없고 독서 습관도 없는 사람들이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불씨 구실을 하는 마을의 지도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을문고가 처음에는 단순한 책 읽기 운동으로부터 출발하고 보면, 자연히 무슨 좋은 일, 부락에 도움이 되는 일을 공동으로 실천해보고 싶어질 것입니다. 문맹퇴치, 청소, 환경미화, 농사개량, 생활개선, 이렇게 운동이 차츰 확대되어 마침내 독서회원을 중심으로 내 고향 내 마을의 생활문화 향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책을 읽음으로써 스스로 깨쳐서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독서회가 착실히 일을 하게 되면 회원들의 회비만으로도 마을문고에 좋은 책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며 훌륭한 마을문고로 키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을문고는 마을 사람들의 참다운 배움의 집이 될 것이요, 독서회는 마음과 행동의 중심체가 될 것이며, 새 삶의 지식과 희망을 주는 샘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문교부 후원으로 마을문고라는 기관지를 창간하게 되었으니 이 자그마한 잡지가 이 운동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마을문고를 창안하고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시범 운영하던 1960년 우리나라 도서관 실태는 국민 총인구 약 2천 5백만 명에 공공도서관은 18개 관으로 인구 139만 명당 1개 관이 있었다. 그나마 도서관도 대도시에 소재하고 있어서 대부분 국민은 도서관을 이용할 환경이 되지 않았고, 정부에 도서관 발전정책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엄 관장은 주민들 스스로 독서 여건을 마련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도서관 씨앗을 뿌려 자립으로 소 도서관을 만들고, 스스로 읽을 권리를 찾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문고는 어디까지나 공공도서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당시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 운영하는 시설이다. 문고가 공공도서관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공공도서관이 설립되기 전까지 마을문고가 지역의 소 도서관으로 역할을 하다가 시·군 단위에도 도서관이 생기고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면 마을문고는 공공도서관의 분관이나 서비스지점으로 흡수시킨다는 구상이다.
그때는 공공도서관은 전문성을 가지고 마을문고 운영을 지도하고, 마을문고는 도서관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 골고루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호보완적 시스템으로 연계하고자 했다. 이 시스템은 마을문고의 발상지 경주시립도서관에서 실행했다. 제2대 경주시립도서관장을 맡은 김종준은 《마을문고》 창간호에 ‘씨앗을 가꾸며’라는 제목으로 공공도서관이 중심이 되어 마을문고 운영을 지도한 사례를 기고했다. ‘마을문고가 애기 도서관이라면 공공도서관은 어머니 도서관입니다. 어머니가 애기에게 젖을 주듯 어머니 도서관은 애기 도서관을 도와주는 기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경주시립도서관은 마을문고 발상지인 경주 부근에서 비 온 뒤에 죽순 올라오듯이 늘어나는 문고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습니다. 도서관 직원들은 마을문고 관리 운영에 관한 빗발 같은 질의에 응답하고, 마을독서회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도서를 수선해가며 교환해 주고, 마을독서회에 참석하여 밤이 깊도록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보람도 느꼈습니다. 이제 경주 변두리에 170개의 마을문고가 설립되어 도서관의 단순한 협조만으로는 독서회원들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조직적인 지도를 위해 뜻있는 동지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경주 마을독서회 좌담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선 차례로 돌아가며 두 달에 한 번 모여 그 마을문고의 관리운영과 독서회 활동을 견학하고 좌담회를 가집니다.’....(이하생략)정선애 작가는?
대학시절 마을문고 운동 동아리활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서관학과 4학년 때 엄대섭 회장을 직접 찾아뵙고,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 도서관운동 조수로 일했다. 그 후 <대한도서관연구회> 에서 훈련받고 일한 자부심을 가지고 서울시 새마을이동도서관 사서, 한국도서관협회, 학교도서관 등을 거쳐 2006년부 터 관악구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고 2022년 퇴직했다. 2021년 엄대섭 선생의 공공도서관 개혁운동 이야기 「지금 쓰지 않으면 잊혀질 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