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경주도서관이야기<9>도서관운동가 엄대섭의 발자취를 찾아서(8)경주의 역사문화 발굴과 보존, 계승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경주시대’는 창간을 맞아 ‘경주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힘들었던 1950년대 경주시민들에게 지식의 장, 공부하는 장으로 기능을 했던 경주도서관(당시 경주읍립도서관)의 설립과정과 역할, 도서관을 위해 헌신한 엄대섭 선생의 발자취를 준비했다.[편집자 주]경주시민의 공동서재 공공도서관(4)우리문화재를 아끼는 것은 나 자신을 찾고 인류를 사랑하는 길 ‘우리문화재아낌회’와 문화재 보호 선언식 이 이야기는 엄 관장이 경주도서관을 떠나 마을문고 운동을 할 때 사건이지만 경주도서관 정신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소개한다. 경주시립도서관에서 활동하던 김윤근 선생과 <마을문고진흥회>에 근무했던 한성대학교 이용남 교수의 이야기는 서로 맞물린다. 1966년 경주불국사에서는 오랜 세월로 빛이 바래고 낡은 시설을 보수하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기술자들이 절에서 숙식하며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석가탑 모양이 이상하게 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들 놀라서 혹시 탑이 도굴당하지 않았나 하여 탑을 해체해서 확인하기로 했다. 지역에서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불러 전통 방식으로 해체 작업을 하는데 나무로 된 폐전신주를 이용하여 2층 옥개석(지붕돌)을 내리는 과정에서 전신주가 부러지는 바람에 탑신(몸돌)이 넘어져 먼저 내려놓은 3층 옥개석을 덮쳐 부서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천년을 넘게 견디어 온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의 부주의로 순식간에 부서지는 엄청난 사고가 난 것이다. 해체 확인 결과 다행히 도굴은 당하지 않았으나 발굴된 사리병을 극락전으로 옮기다가 깨뜨리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그리고 탑을 복원하면서 깨어진 조각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어딘가로 휩쓸려 나가 찾지 못하고 결국 시멘트로 때우는 어이없는 일이 이어졌다. 1966년 11월 26일, 엄 회장은 경주지역 마을문고 현지를 순회하고 있었다. 평소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기에 잠시 경주불국사에 들렀다가 가슴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했다. 석가탑 보수공사를 하면서 인부들의 부주의로 깨어져 나간 파편들이 주변 흙더미 속에 흩어져 뒹굴며 사람들 발길에 밟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 회장은 문화재가 천시 고 있는 것이 한탄스러워 눈물이 났다고 한다. 파편 아홉 조각을 수습하여 마을문고 사무실로 가지고 와서 깨끗이 씻어 오동나무 상자에 솜을 깔고 담아서 소중히 보관했다. 거기에 ‘서라벌의 이끼’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문화재에 관심 는 지인들을 모아 이 문제를 논의했다. 1967년 1월 6일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 언론인 오소백, 시인 김상옥 등이 모여 「우리문화재아낌회」를 만들고, 조선일보 유봉영 부회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엄대섭, 천관우 선생이 부회장을 맡고, 김상옥, 오소백, 경주의 향토사학가 윤경렬 선생과 경주 출신 사업가 박치현 사장이 함께 했다. 엄 회장이 업무를 총괄했기 때문에 사재 10만 원을 희사하고, 문고사무실에서 실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우리문화재아낌회」는 전 국민이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계몽 차원에서 ‘문화재 보호 선언식’을 계획하고 엄 회장의 뜻을 담아 김상옥 시인이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1967년 1월 29일 경주불국사 범영루에서 ‘문화재 보호 선언식’을 가지고 ‘서라벌의 이끼’를 유봉영 회장이 정부에 증정하고, 엄 회장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문화재 보호 선언식’ 전날, 경주에서 대학생 김윤근과 이철수는 도서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갔다. 도서관에는 마을문고 운동을 위해 서울로 간 엄대섭 회장과 윤경렬 선생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내일 아침 불국사 뜰에서 ‘우리문화재아낌회’ 문화재 보호 선언식이 있으니 춥겠지만 나와서 좀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언식 날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유난히 추웠다. 불국사 뜰 앞 행사장에 미리 도착해 있으니 서울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문 등 언론사에서 나오고, 유봉영 조선일보 부회장, 천관우 동아일보 주필, 오소백 선생, 경주를 대표해서 윤경렬 선생, 박치현 사장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들이 모였다. 드디어 선포식이 시작되었다. 엄 회장이 무겁게 들고 온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석가탑에서 떨어진 조각이라고 했다. 유봉영 회장이 다시 복구할 수 있도록 정부에 돌려주는 증정식을 하고, 엄 회장이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울먹이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선 언 문]내가 있으므로 민족이 있고, 민족이 있으므로 인류가 있다. 내가 진실로 나를 옳게 사랑함은 내 민족을 사랑함이요, 또 내 민족을 옳게 사랑함은 인류를 사랑함이다. 무릇 인류를 사랑함에도 그들이 쌓은 바 문화를 사랑함이 가장 으뜸가는 일임은 다시 말할 것 없다. 까닭인즉 문화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보다 슬기로운 생명의 기록이요, 또 그 생명을 값치는 정확한 저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민족의 성장도 마땅히 그 문화유산으로 척도 되어야 한다. 다행히 우리 겨레는 오랜 생활사를 통하여 빛나는 기록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일찍이 동양인으로서 세계의 풍운을 휩쓸어 원나라를 세운 몽고족도, 또 강대한 만주벌판의 주인으로 청나라를 세운 애신각라족청 태조 누르하치의 성(姓)을 만주어로 발음하면 아이신줴뤄[愛新覺羅]가 된다. 후대에 성이 부족명이 됨.(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그밖에 모든 동방의 군소 민족들이 저 대해와 같은 한족 문화에 흡수되어 그 형해마저 찾을 길 없는 오늘, 비록 지난날에 정치로는 실패를 거듭하여 약소와 사대의 누명을 쓰고 살아온 우리 민족이언만 그 생명력의 질김은 그의 누린바 빛나는 문화로서 소소히 증거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혼과 그 생명의 기록인 고유한 우리 문화재는 뜻 아닌 횡액으로 작금에 이르러, 연이어 인멸되는 비운에 부딪치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넋이 그대로 무너져 내림을 보는 듯 아픔을 견딜 길 없다. 진실로 우리의 문화재야 말로 우리의 어제를 거울삼고 오늘을 다짐하고 내일을 보람하는데 더 할 수 없는 귀중한 재보임은 다시 말할 나위 없다. 이 재보를 잘 보호 관리하여 다음 세대에 넘겨줌도 우리들의 맡은바 뜻있는 일이지만 이것을 더욱 아낌으로 하여 당장에 허둥대는 우리들의 마음을 제자리에 앉히고 들떠 있는 우리들의 생활을 보다 꽃다이 가꿀 수 있는 길을 트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소임을 맡은 국가기관이나 몇몇 분들의 노고에만 맡기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뒤늦게나마 저희들이 저희들의 일로 깨닫고 함께 일어나서 우리의 주변, 우리의 산천에 흩어져 있는 유형, 무형의 문화재를 우리 스스로가 아낌으로서 내가 나를 찾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서고, 또 나아가 민족과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에까지 다다르자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 불붙이기 위하여 저쪽 서구 문명의 발상지인 아테네와 겨루어 손색없는 우리 「문화의 서울」인 천년고도 경주의 유서 깊은 고장에서 이 모임의 뜻하는 바를 횃불들어 만천하에 밝혀 선언하는 바이다.1967년 1월 29일우리문화재 아낌회 ------------------------------------------------------------------ 그날따라 눈보라도 치고 날씨가 유난히 추웠다. 그 가운데 김윤근과 이철수는 행사 내 현수막을 잡고 있어야 했다. 그 추운 날씨에 현수막을 잡고 있을 생각을 하니 너무 힘들 것 같아 땅바닥을 파고 현수막 대를 세우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엄 회장은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자고 선언식을 하는데 불국사 바닥을 훼손해서 되겠느냐’며 마당을 파지 말고 춥겠지만 너희가 좀 잡고 있거라 하여 어쩔 수 없이 눈보라 속에서 덜덜 떨며 긴 시간 현수막 대를 잡고 있어야 했다. 그날 이후 김윤근 선생과 이철수 선생은 문화재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누렇게 색바랜 선언문과 취지문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 보호 선언식 후 석가탑은 다시 보수했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시멘트로 메꾸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때 석가탑에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과 사리함 장엄구, 고려 현종 때 경주지방에 지진으로 보수하면서 넣은 중수문서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때 상황을 이용남 교수(당시 마을문고진흥회 총무)도 잘 기억하고 있다. 엄 회장의 분노는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문고 직원 입장에서 보면 기존 업무만 해도 바쁜 상황에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우리문화재아낌회’ 업무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으니 반가울 수 없었다. 이를 눈치 챈 엄 회장은 ‘문고 일도 바쁜데 문화재 운동까지 끌어들이나 싶겠지만, 도서관 운동이나 문화재 운동은 기록물이든 조형물이든 다 같이 인류의 문화유산을 잘 전승하고 그 뜻을 익히자는 것이다. 같은 정신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 일은 독서운동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기 바란다. ‘우리문화재아낌회’ 활동은 문화재 보호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문화재 운동을 문고사무실에서 지속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용남, 『이런 사람 있었네』 한국도서관협회, 2013라는 설명이었다고 한다.
‘문화재 보호 선언식’에 당시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오는 등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사회 각계에 널리 인식되고, ‘우리문화재아낌회’는 ‘흥덕왕릉 도굴 미수사건 조사보고서’‘경주 고적보호를 위한 건의서’를 내서 사회와 정부의 호응을 얻었다. 3월에 ‘사단법인 신라문화재애호가’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여 경찰로 구성된 문화재 애호반도 발족했다. 이로써 문화재 보호 문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고, 엄 회장은 마을문고 재정 문제로 동분서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떼게 되었다고 한다. 엄 회장의 문화재 보호에 대한 각별한 마음은 ‘우리문화재아낌회’ 선언문과 취지문에도 나타나 있지만, 경주시립도서관 운영목적과 목표 등 곳곳에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문화재 사랑은 <대한도서관연구회>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당시 도서관 자료와 정보를 얻기 위해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도 시간이 허락하면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우리 민족과 임진왜란 때에 끌려간 선조들의 얼이 담긴 유적지를 돌아봤다. 경주도서관 어린이향토학교‘경주도서관 어린이향토학교’는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에서 비롯되었다. 1954년 어느 날 경주박물관 진홍섭 관장과 윤경렬, 엄대섭, 김종준 등 향토문화 보존과 전승에 관심이 많은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경주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무분별하게 훼손되고 있는 것을 걱정하며 문화재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는 것은 경주사람들이 무지하여 문화재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앞으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러한 취지를 살리기 위해 경주박물관에서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를 개설하게 되었다. 1961년 진홍섭 박물관장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새로 부임한 관장이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 운영에 난색을 표하자, 박물관학교를 이끌고 있던 윤경렬 선생은 어쩔 수 없이 문화재 현장을 찾아다니며 야외 수업을 이어갔다. 경주시립도서관 엄 관장은 마을문고 운동을 위해 서울로 떠났지만,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김종준 선생이 시청각실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경주도서관 어린이박물관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운영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서도 어린이도서실 마련은 못 했으나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리고 자부심을 일깨우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 후 1975년 경주박물관을 신축하여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를 다시 개강할 수 있게 되자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와 ‘경주도서관 어린이향토학교’로 나누게 되었다.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는 최용주 선생이 맡고, ‘경주도서관 어린이향토학교’는 김윤근 선생이 맡아 지도했다. 교가도 같이 사용하면서 뒷부분만 ‘박물관학교’와 ‘도서관학교’로 바꿔 불렀다. ‘경주도서관 어린이향토학교’는 1979년 도서관 사정으로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윤경렬 선생과 김윤근 선생은 ‘경주 어린이독서교실’에서 독서 교육과 더불어 박물관학교의 취지와 뜻을 이어갔으나 1985년 이마저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는 현재까지 경주박물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 교가는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윤경렬 선생이 노랫말을 써서 서울로 간 진홍섭 관장에게 보냈는데 진 관장이 조지훈 시인에게 부탁하여 내용을 다듬고, 작곡가 윤이상 선생에게 부탁하여 곡을 붙였다. 당시는 윤이상 선생이 유명해지기 전이라 진홍섭 관장 청으로 교가에 곡을 붙여 개교 1주년 축사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왔다고 한다. 그리고 196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그 후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겨레의 고운 얼 길러준 뿌리 이어 내린 이 천년 거룩한 땅에 움트는 새싹들이 자라나는 곳 아~ 우리 어린이 도서관학교(박물관학교) 하늘도 내 교실 땅도 내 교실 맑고 푸른 하늘에 펼쳐라 높이 꽃피는 새싹들이 자라나는 곳 아~ 우리 어린이 도서관학교(박물관학교)
정선애 작가는?
대학시절 마을문고 운동 동아리활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서관학과 4학년 때 엄대섭 회장을 직접 찾아뵙고,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 도서관운동 조수로 일했다. 그 후 <대한도서관연구회> 에서 훈련받고 일한 자부심을 가지고 서울시 새마을이동도서관 사서, 한국도서관협회, 학교도서관 등을 거쳐 2006년부 터 관악구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고 2022년 퇴직했다. 2021년 엄대섭 선생의 공공도서관 개혁운동 이야기 「지금 쓰지 않으면 잊혀질 이야기」를 썼다.